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강산 투쟁 (문단 편집) === 공산당의 위기 === 9월 19일 스탈린은 모든 중국 공산당원에게 국민정부는 탈퇴하되 국민당에는 잔류하라는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고 국민당을 탈퇴하라고 지시했다. 9월 20일 한커우의 취추바이에게 스탈린의 지령이 하달되었다. 하지만 국민당의 탄압이 거세져서 공산당 중앙은 9월 말 여전히 지하활동이 왕성했던 상하이로 이동해야 했다. 위기 상황에서 공산당 중앙은 마오쩌둥에게 책임을 물었다. 장사 주재 소비에트 영사 겸 소비에트 대표인 쿠추모프는 마오쩌둥이 장사를 공격하지 않은 것을 두고 맹비난을 퍼부었고 마오쩌둥이 직무 유기를 통해 수치스러운 배신을 저지른 비겁자라고 주장했다. 취추바이는 런비스를 전권대표로 장사에 파견하여 즉각 행동을 취할 것을 명령했지만 런비스는 폭동의 시기가 이미 지나갔다고 판단하여 당위원회 지도부 조직 개편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1927년 11월 7일부터 14일까지 로미나제와 올가 미케비치의 주재로 임시중앙정치국 확대회의가 상하이에서 열렸다. 확대회의는 <정치기율결의안>을 채택하여 마오쩌둥과 펑공다를 비롯한 후난성의 인물들을 비난했다. 마오쩌둥은 중앙 임시정치국 후보 위원 자격을 박탈당함으로 정치국에서 축출되었고 마오쩌둥을 군사 기회주의자로 규정했다. [[저우언라이]]도 마오쩌둥을 맹비난했다. >"마오쩌둥의 부대는 토비들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 그런 지도자는 일반 군중의 역량을 믿지 않기 때문에 '군사적 기회주의'에 빠지기 쉽다." 허나 중국 공산당이 기획한 12월 [[광저우 폭동]] 역시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이 과정에서 [[장타이레이]]가 사망했다. 6만을 헤아렸던 공산당원의 수도 급감하여 1만 명으로 감소하였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대다수의 공산당원들은 마오쩌둥처럼 시골의 오지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